인터뷰. 권소이 에디터


꾹 눌러 걸어온 발자국은 쉬이 지워지고, 새로 내딛는 발걸음은 방향성과 깊이가 맘 같지 않다. 그럼에도 알 수 없는 내일에 전전긍긍하기 보다 현재를 견디며 잘 보내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작가 이현호는 그렇게 본인의 속도와 생각의 끈을 따라 그만의 기울기로 궤도를 그리고 있다. 


그는 부모님의 둘째 아들이고, 예쁜 부인의 남편이고, 얼마 전 태어난 둘째로 당분간은 밤잠을 포기해야 하는 한 살, 두 살 연년생 남매의 아빠이고, 학원 아이들에겐 미술선생님이고, 13살 노견 모모의 보호자인 동시에, 여전히 꾸준히 작업하고 전시하는 작가이다. 그래서 길게 호흡하지 못한채 시간에 쫓기듯 바쁘게 지낸다. 그러다보니, 때론 온전히 작업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다른 한 편으론 작가로 살아가겠다고 더 나은 형편을 주지 못하는 건 아닌가 싶어,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그럼에도 ‘인생은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는 랠프 앨리슨의 말처럼 사랑과 책임감, 작가로서의 열정과 욕구 그 감사와 갈증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쉽지 않지만, 지금 할 수 있는 방법과 시간을 찾아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중이다. 아직 끈 놓을 만큼 욕심이 없지도않고, 해 보고 싶은것들을 다 펼쳐내보지 못했으니까. 고민하며 상황에 맞는 방법도 모색하고 에너지를 이렇게 저렇게 분배해 일과 작업 둘 다 유지하며 꾸준히 끌고 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중이다. 어디 쉬운 인생이 있던가. 좋은 작업을 위해선 고뇌가 필요하지... 읊으며, 언젠가 온전히 집중해 제대로 할 수 있을거란 희망찬 생각도 해보며.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걱정에 길을 잃기보다 경험하는 현재 매일의 삶 그대로를 바라보며 그 속에 단단히 두 발 붙이고 조금씩이라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다.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담백한 시선으로, 놓여진 현재 그 상태 그대로를 바라보면서. 한 점, 한 점 찍으며 조심스레 채워지고 쌓여지는 그의 작품처럼, 흉내내지 않고, 과장하지 않고, 진심을 담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은 딱 그만큼의 무게를 감당하며, 그 속의 잔잔한 즐거움을 찾아 오늘도 그렇게.

[이현호 작가 인터뷰] 어쩌면 지금, 조금 더딘 걸음일지라도

축하드린다. 최근에 둘째 아이를 얻으셨다고 들었다. 


산후조리원에 있다 어제 처음 집으로 왔다. 연년생인지라 큰 아이도 아직 아가라 돌봐줘야 할게 많은데다 동생이 생기는 게 엄청난 스트레스라 들어서 이것 저것 신경 쓰고, 두 시간에 한 번씩 깨는 둘째 아이 덕에 제대로 잠을 못 잤더니 오늘 상태가 이렇다. 



아이들 얘기가 나와서 그런지 작가님의 어린 시절도 궁금해졌다. 


 잘하고 싶고, 인정 받고 싶었던 어린이였다. 친구들 몇몇이 함께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소통하고 인정하기 보다 경쟁의 느낌이 강했다. 만화랑 미술로는 네꺼보다 내께 더 좋아 서로가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생각나는 건 벽이란 벽엔 크고 작은 액자가 붙어 있던 우리집이다.  특히 소파 뒤 그러니까 TV 맞은편 벽에 걸어둔 큰 산수화 그림을 좋아했는데, 어린 내눈에도 다른집 작품보다 우리집 그림의 형태나 스타일이 더 좋다고 느꼈다. 반대로 프린트 된 샤갈 액자는 채색과 터치를 불편해했었던 기억이 난다.  



아이가 생기고 작업도 좀 달라지게 됐나? 

기본적인건 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호흡이 짧아졌다고 해야하나? 점으로 시작해 무한 반복하며 쌓고 쌓으며 작업을 하다보니 연결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온전히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보니 호흡이 길게 이어지는 작업은 어렵더라. 그래서 호흡이 짧아도 할 수 있는 작업을 찾아하고 있다. 드로잉도 그 중 하난데, 큰 화면을 그릴 때 느끼는 부담감이나 완벽에 대한 얽매임 없이 그리는 시간 자체를 즐기게 되서 하루에 하나 또는 이틀에 하나씩 작업하기도 했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일 겨울 참새도 과정은 많지만 짧은 호흡으로 이어나갈 수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참새는 어떻게 작업하게 된건가? 도자 작업 하시는 줄은 몰랐다.


도자기는 아니고, 지점토로 만들었다. 백 개 정도 만든 것 같은데, 한 데 모아 놓고 보면 운집해 있는 모습이 하나의 작품이 될 것 같더라. 이 새 한 마리가 회화 속 점 하나의 느낌이랄까.  2012년 아는 형이랑 같이 살던 이태원 집에 큰 창이 있었는데, 창을 열면 감나무가 보이던 바깥 풍경이 그 집의 낭만이었다. 그 풍경을 보고 싶어, 우풍도 세고 안그래도 추운집에서 한참을 창을 열고 밖을 바라보곤 했었다. 푸르렀던 계절이 지나면 나무에서 감이 무르익고, 그것도 다 사라진 한 겨울에는 잎도 다 떨어져 메마른 가지만 남은 모습도 바라다보고, 아침 새소리도 듣고, 새들이 쉬었다가 물 마시는 것도 보고, 앙상한 가지에 앉은 모습도 지켜보고. 관심이 가기 시작해 그때부터는 발견할 때마다 관찰하고 사진으로도 기록하고, 조금씩 작품 속에 작은새를 그려넣기 시작했고, 그 새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작가님이 만든 참새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모습이 보통 참새랑 살짝 달라보인다. 


우리가 아는 참새랑 똑같은 참새다. 가녀린 그 참새가 겨울이 되면 저렇게 통통하고 귀여운 모습이 된다. 그런데 그게 실은 추운 겨울을 나는 생존수단인거다. 몸에 지방도 비축하고, 털도 부풀려 그 사이에 따뜻한 공기도 가둬두고. 자신을 변형시켜가면서 살아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애 쓰는걸 보니 그 상황이 좀 안됐기도하고, 출근길에도 잎 하나 없는 나무가지 사이에 숨어 움직이는 것 보니 안쓰럽기도 했다. 학원에서 수업과 수업 사이의 비는 시간도 그렇고 짬짬히 나는 시간 중 무얼 할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마음에 남았는지 그 참새가 생각나더라. 그렇게 작업하게 됐다.

맞다, 발자국 소리가 큰 아이들에서 그림 지도를 하신다고 들었다. 수업은 어떤가?


왕복 4시간의 출퇴근길과 작업 시간 확보의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좋다. 학생이던 2008년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꽤 됐네. 7살에 만나 중학생인 지금까지 다니고 있는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행복하고, 학부모님들을 통해 부모의 자세를 배울 수 있는 점도 좋고,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뽑아내는 친구를 보는 것도 흥미롭다. 선생님은 이번엔 무얼 그리냐고 물어봐주기도 하고, 학원에서 틈새 작업한 참새도 궁금해해서 수업에 연결지어 보기도 했는데 아이들은 새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걸 만들어내더라. 닭도 만들고, 양도 만들고... 아이들의 변화무쌍함과 자유로운 변형에서 영감도 받고 배우기도 한다. 내 작품이 꽂혀 있는 몇몇 대상에 한정되어 있는건 아닌지 생각도 해보게 되고.   



계속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그 대상은 무언가? 


누구나 일상에서 쉽게 만나는 풍경이다. 어쩌면 너무 익숙해서 그냥 지나칠수도 있는 주변의 나무나 아파트 단지 옆 숲, 작은 생명들. 굳이 찾아나서지 않아도 출근길에 또는 산책길에 마주하는 활동반경 속 모습들에 꾸준히 관심이 있다. 다니는 동선 중에 눈길을 잡는게 있으면 먼저 사진으로 남긴 후, 시간 날 때 다시 가서 보기도하고, 시간과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느낌도 관찰하고 그러다 호기심이 생기고 의미있게 와닿는 지점이 있으면 작업으로 연결시키기도 한다. 어렵지 않은 주제이고 작품이다 보니 관객들이 같이 공감하며 편하게 느꼈으면 한다. 바람이 있다면 작품을 보는 관객들 스스로가 그들 속 일상의 장면과 시간, 그 상황과 소식들에 조금 더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들이 쌓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더 많이 소통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게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섬세한 관찰자의 시선이 느껴진다.


창작물이라고 해서 작가가 마구잡이로 개입하고 마음대로 내지르고 펼쳐내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 생각한다. 놓여있는 현재 상태를 공상이나 상상을 배제하고 현실성과 현장성을 담아 표현하려고 하는 편이다. 변형과 왜곡 없이 대상을 화면에 담기 위해 나는 그저 대상을 집중해 바라보고작가로서의 내 의도가 조심스럽게 담기도록 할 뿐이다. 



현수막 작업들은 어떻게 하게 된건가?


주변 풍경을 그리다보면 늘 공통적으로 보이던 모습이 현수막이었다. 소외된 것들에 대한 연민이  있는 편이지만 안타깝게 표현되기 보다는 재미있게 풀어내고 싶은 마음도 있고, 보관과 유지가 쉽지 않은 동양화의 제약을 뛰어넘을 다른 재료를 사용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그럴 때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거다. 일회성으로 사용되다 다 쓰여진 후엔 쓰레기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현수막은 운이 나빠 신고라도 받으면 걸자마자 사라지는 지자체의 골칫거리라 나라도 대신 시간을 좀 오래 써주자는 마음이 있었다. 현수막 자체를 소재겸 재료로 삼아 화폭으로 삼고, 뒷면에 그림을 그렸는데 앞면에 있는 광고 문구와 전화번호들이 그대로 투영되어 보이도록했다. 시멘트 덩어리, 공사 현장의 철골, 직접 쌓은 재단처럼 보이는 돌탑 등에 계절성을 위해 더한 여린 꽃과 풀 등 주변에 존재해 왔으나 존재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던 대상들을 그림 속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현수막 위에 동양화 재료로는 그리기가 수월치 않아 아크릴을 사용했는데 레지던시에서 작업했던 1년의 시간을 이 작업에 다 썼었다.



동양화 전공이라고 알고 있는데 작가님의 작품은 일반적인 동양화의 특징과 다소 거리가 있는 것 같다. 


 동양화 속 산수화에서 기대하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없어서 그럴거다. 끝내주게 아름다운 폭포, 훤칠한 소나무 등 수려한 경광 흔히 비경이나 절경이라고 하는 아름다움만 주는 풍경에는 관심이 없다. 게다가 동양화에서 보이는 여백이 없어서 더 그럴텐데, 강사선생님들을 통해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됐고, 대학원 때부터 쭉 어떻게 하면 뻔한 동양화 속 대상과 구도에서 탈피해볼까가 고민이었다. 때론 확대하기도 때로는 형태나 구조를 드러내지 않고 최소화하며 따라가지 않고 내 나름의 그림을 그려보려고한다. 경험하는 풍경 같은 걸 찾아나선 것도 그때의 가르침과 고민, 깨달음 때문이고.



그리는 작업 과정을 설명해달라. 


동양화 중에서도 화선지를 여러겹 붙여 만든 두꺼운 장지를 사용한다. 아교를 물에 풀어서 종이에 바르고 농도에 따라 적절히 스미고나면 색을 입히는데, 초록을 표현하고 싶다고 대뜸 초록을 바르지 않고, 베이스로 밑에 몇 번 더 다른 색을 쌓는다. 그러면 그 색들이 중첩되며 미묘한 색감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런 색색의 점들을 찍고 또 찍으면 점이 이파리도 되고 그림자도 되고, 나무도 되고 색의 깊이도 만들어 낸다. 최근에는 물감의 농도를 높여 두껍게 발라 밑색을 아예 감추기도 하고, 재료 쓰는 방식도 최대한 다양하게 해보려고한다. 소심해서 방식만 조금 바뀌어도 걱정, 색 칠 할 때랑  건조된 후 남는 진짜 색이 다르니 알 수 없는 결과에 또 걱정하며 조심스러웠던 때도 있었는데 해왔던 방식이 아니더라도 조금씩 이렇게 저렇게 시도해 보려는 중에 있다.

앞으로 어떻게 작업하고 싶나? 


결론 지으려는 압박이나 부담을 덜어내고 막 해보고 싶다. 그분들이 진짜 어떻게 작업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작업을 봤을 때, 진짜 막 그려내셨구나 그런 느낌이 들면 너무 부럽더라. 생각이 많은 편이라... 아이들에게는 ‘일단 먼저 해 봐.’라고 말하면서 막상 나는 그러질 못하니까. 미완이 되더라도,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작업이라도, 언젠가는 할 수 있겠지 생각하며 시원하게 그려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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