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밤. 가려졌던 겨울의 민 낯. 철새들의 울음, 나무 태우는 냄새, 시리게 녹아 번지는 생명의 발자국. 자박자박 다가간 온전한 고요안에서 붓질로 고백하는 여백. 나도 너도 지워지고 눈만 남아. [작가노트] 어떤 연대 늘 어떤 순간을 기다린다. 말이나 글로는 나열할 수 없는, 무언가에 마음이 동해 붓을 들게 하는 시점. 그 시점은 대상과의 온전한 교감을 통해야만 다다르는 시간과 경험의 축약이다. 매일 마주하는 수많은 대상과 풍경 속에서 늘 나의 시선을 붙드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을 한번 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면서’ 보는 것이다. 뜨거운 여름의 습기와 세찬 비바람, 온화한 노을, 눈 오는 밤을 걷다가 멈추며 온 몸으로 겪은 어떤 연대의 감각에서 그림은 시작된다. 밤새 눈이 왔고, 언제나 걷던 길로 산책에 나선다. 오늘의 겨울은 무수히 다른 계절의 어느 마디 즈음일 것이다. 빛을 머금고 나뭇가지 위에 빛나는 흰 눈과 하늘을 반사한 그림자의 색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변화와 신비로움은 그동안 오랜 도시 생활에서 잊고 살았던 태초의 감각을 일깨운다. 모순적 이게도 나는 모든 것이 잠든 듯 보이는 북쪽의 겨울 안에서 살아있는 생명의 움직임을, 지나오고 다가올 모든 계절을, 그리고 비움의 아름다움을 본다. 이것을 화면에 담기 위해 눈을 감는다. 흰 종이가 그대로 눈이 된다. 눈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비워두기 위해, 그림자의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표현하기 위해, 느리고 빠른 붓질의 호흡이 그대로 남겨지도록 하기 위해 종이와 수채를 택한다. 수채는 농담濃淡 으로 화면을 다뤄야 하기에 쓰이는 물의 양과 종이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물이 공기 중으로 증발하여 안료가 안착되는데, 물감을 얼마만큼 쓸 것인지, 붓질의 속도를 어떻게 할 것인지 살피는 시간이 결과에 그대로 드러난다. 붓이 물과 안료를 머금고 종이에 닿기까지 심층 적이고 직관적인 선택의 과정이 필요하고, 나는 이 밀고 당기기의 과정에서 오는 긴장과 몰입의 순간을 즐기는 듯 하다. 흰 종이가 흰색으로 온전히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겨울에 어울리는 온도의 파란색이 필요했다. *망가니즈 블루(Manganene Blue)는 많은 파란색 중에 겨울 공기에 가장 잘 어울렸다. 이 색을 중심으로 다양한 색을 섞어서 사용했다. 하늘과 나무 그늘과 물의 파란색은 모두 다르다. 나는 자연을 자연 답게 표현하기 위하여 늘 색을 끈질기게 관찰하고 고민하는 편이다. 비워진 여백에도 수많은 색과 소리가 담겨있다. 동양의 선조들은 산과 물, 꽃과 새의 생기로움을 담기 위해 몰골법沒骨法 을 썼다. 스케치와 같은 윤곽선을 쓰지 않고 단번에 그려내는 기법으로 마치 서양의 드로잉과 같이 순간의 감정과 에너지를 잘 드러낼 수 있는 기법이다. 이는 대상과 나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합일하여 형상 너머의 기운을 함축하여 담고자 하는 동양의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이러한 태도로 지금 이 시대에 내가 ‘살고있는’ 지역의 자연과 풍경을 담고자 한다. 눈은 면面이 되고 마른 나뭇가지는 선线 이 되며, 철새는 점点 이 되어서 화면에 생명력을 재구성한다. 시선은 계속 움직인다. 하늘에서 땅으로, 멀리서 점점 가까이, 걸음걸이에 맞추어 이동한다. 나는 풍경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그 풍경과 하나가 되어 감각하는 주관적 체험을 공유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계절의 변화와 그에 따른 불규칙한 자연의 생김새에서 특별함을 발견하고, 그와 다르지 않은 인간의 삶을 교차해 본다. 그렇기에 이것은 그저 풍경의 재현 이라기 보다 개인의 몸을 통한 체현體現 이다. 이렇게 무언가를 그리기 위해 본다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시도이며, 존재와 대면하여 이어 가는 대화이다. 오늘날과 같은 비대면의 시대에서 회화는 물성으로 접촉하는 대면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자연은 언제나 나에게 가장 큰 책이며 선생님이다. 추수가 끝난 논두렁을, 떨어지는 빗방울이 흙에 스미는 모습을, 개천의 언 물이 녹는 모습을 낯설게 바라본다. 그리기 위해 본다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길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나는 그리기 위해 봄을 통해서, 그리는 과정속에서 보이는 것 너머의 무언가와 접촉하게 된다. 이렇게 그림으로 자연을 깊게 호흡하다 보면 세상에 당연한 일은 없다는 것이 다시금 일깨워지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과 생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눈 위로 남겨진 새의 발자국처럼 종이 위에 남겨놓은 이 흔적들을 누군가 본다면 그저 관람자로서 보기 보다는 색과 붓질이 만드는 고요와 긴장 속으로, 곧 스스로를 잊어버려 풍경 안에 두고 나올 때까지 아주 깊이 걸어 들어가는 경험을 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다시 돌아온 각자의 일상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건져올리기를 바란다. *망가니즈 블루 Manganese Blue _망가니즈는 망간이라 불리우던 금속 원소로 고대시대부터 유리의 색을 조절하거나 색 지움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물질을 이용하여 만든 푸른색 계통의 안료를 망가니즈 블루라고 한다. 춥고 시린 계절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반드시 발견할 수 있는 생의 온기.수고했다며 살며시 덮어안는 눈이불은 뾰족한 세상을 둥글게 껴안는다. 에세이 《그리는 마음》, 그림책 《연남천 풀다발》, 《적당한 거리》 를 쓰고 그린 전소영 작가와 함께 작가의 신간 수채화집 《Manganese Blue》 의 원화를 포함한 36점을 선보입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전소영 《Manganese Blue:겨울의 마디》2024. 8. 2(FRI) - 8.10(SAT) / 1-7PM골든핸즈프렌즈 계동(종로구 계동길 99 한옥) 전소영 Jeon so young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오랜 시간 도시에 살다가 지금은 파주 문산에 거주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네 번의 개인전을 가졌고, 여러 단체전과 기획 전시에 참여하고 있다. 자연의 생명성과 존재에 대한 사유를 다양한 물성으로 표현하는 방식에 관심을 두고, 책과 회화 작업으로 풀어내고 있다. 쓰고 그린 책으로 「연남천 풀다발」2018, 「적당한 거리」2019, 「아빠의 밭」2021, 「그리는 마음」2023 등이 있다. -